
"1학년 1학기와 2학기 시험을 치르고 나니 내신 평균이 3등급대 초반으로 굳어졌어요. 이 성적으로는 목표로 하던 서울 주요 대학이나 의약학계열 수시 학생부위주전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학교에 남아 수능과 무관한 수행평가나 교내 비교과 활동에 시간을 쏟느니, 자퇴 후 검정고시를 치르고 수능 공부에만 100% 몰입하는 편이 합격 확률을 훨씬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퇴를 선택한 B(17)군의 말이다. B군은 현재 대치동의 한 대입 전문 관리형 학원에서 하루 14시간씩 수능 기출 풀이와 모의고사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과거 교우 관계 갈등, 비행, 학업 부적응, 가정 형편 등의 사유로 여겨졌던 고등학교 학업 중단(자퇴)이 최근에는 상위권·중상위권 학생들의 철저한 '대입 전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배움과 인성 형성을 위한 공동체 공간이어야 할 학교를 '내신 점수 따기 수단'으로만 축소시킨 현행 입시 구조가 멀쩡한 학생들을 사교육 시장과 독서실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학년 내신 망치면 누적 회복 불가... 상대평가와 '정시 40%'의 틈새
교육통계에 따르면 일반고와 특목·자사고를 가리지 않고 학업을 조기에 중단하는 고교생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은 경직된 '내신 상대평가 체제'와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 40% 선발 기조'가 맞물린 결과다.
수시모집의 핵심 축인 학생부교과전형 및 주요 대학 학생부종합전형은 1학년 1~2학기 내신에서 1~2등급 극초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합격선에 도달하기 어렵다. 내신은 누적 평균으로 산출되기 때문에 1학년 때 한 번 등급이 떨어지면 남은 학기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거두더라도 누적 등급을 극적으로 뒤집는 것이 수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교육부의 대입 공정성 강화 방안에 따라 서울 주요 16개 대학은 수능 위주 정시 선발 비율을 4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다. 수시 이월 인원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인 정시 비중은 절반에 육박한다. 결국 "내신은 이미 버렸으니, 하루라도 빨리 학교를 나와 수능에 올인하는 것이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냉정한 셈법이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번지게 된 것이다.
검정고시와 논술의 결합, 그리고 '하루 14시간 자습권' 확보
물론 서울 주요 대학의 수시 학생부교과전형은 검정고시 출신자의 지원을 제한하거나 학교생활기록부가 필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검정고시 만점만으로 상위권 대학 학생부 전형을 무혈입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자퇴를 감행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는 '오로지 수능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절대적 공부 시간의 확보'다. 학교 수업, 체육대회나 축제 등 교내 행사, 수능 시험과 무관한 과목의 수행평가에 뺏기는 시간을 아껴 재수생과 대등하게 경쟁하겠다는 계산이다.
둘째는 '검정고시 대체 평가 룰'의 활용이다. 일부 대학의 수시 논술 전형이나 실기 전형, 그리고 일부 수도권 대학에서는 검정고시 고득점을 내신 상위 등급으로 환산(비교내신 적용)해 준다. 학교에서 치열한 내신 쟁탈전을 치르며 3~4등급을 받는 것보다, 검정고시에서 98~100점을 취득해 내신 감점을 최소화한 뒤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충족시키는 편이 훨씬 실리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한다.
무너지는 교실 면학 분위기, 번창하는 '자퇴생 전문 사교육'
이 같은 전략적 자퇴의 확산은 공교육 교실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2학년 교실만 들어가도 일찌감치 수시를 포기한 '정시 파이터'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타 과목 수능 문제집을 푸는 등 교사의 수업권과 정상적인 면학 분위기가 크게 훼손된다.
공교육이 흔들린 틈새는 사교육이 발 빠르게 잠식했다. 서울 대치동과 목동, 일산 등 주요 학원가에는 '고교 자퇴 컨설팅', '검정고시 1년 패스 + 수능 독학재수 패키지반'을 내건 전문 입시 시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막대한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의 학생들은 자퇴 후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대입을 준비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학교 밖에서 방치될 위험에 노출되면서 교육 양극화마저 심화되고 있다.
[진단과 대책] 공교육 이탈 방치 안 돼... 입시 제도 개선과 학교 안전망 시급
전문가들은 전략적 자퇴를 개인의 자유로운 진로 선택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청소년기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배양해야 할 사회성, 갈등 해결 능력,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인성 발달의 기회가 통째로 박탈되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붕괴를 막고 비교육적인 자퇴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 정성평가 및 성취도 반영 확대: 1학년 성적이 다소 낮더라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적 성장과 진로 노력을 입증한 학생을 적극 선발하는 회복탄력성 평가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 검정고시 비교내신 룰의 합리적 재정비: 공교육 교육과정을 성실히 이수한 학생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일부 대학 수시 및 정시 전형에서 검정고시 만점자에게 부여되는 내신 환산 기준이 과도한 특혜로 작용하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정비해야 한다.
▲ 고교 내 심화·수능 연계 맞춤형 트랙 인정: 고학년으로 갈수록 수능 준비에 집중하길 원하는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내몰지 말고, 고교학점제 테두리 안에서 심화 과목 선택과 수준별 자율 학습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한 교과 운영이 필요하다.
▲ 학업 중단 숙려제의 내실화: 형식적인 서류 작성과 면담에 그치고 있는 현재의 학업 중단 숙려제 기간 동안, 전문 진로·진학 코칭과 심리 상담을 병행하여 충동적 대입 셈법에 휩쓸리지 않도록 돕는 안전망이 가동되어야 한다.
교육계 관계자는 “단 몇 번의 지필평가 실패로 학창 시절 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 입시 제도는 실패한 것”이라며 “학교가 오로지 수능 점수와 내신 등급을 산출하는 공장이 아니라, 다양한 아이들의 역량을 품어주는 배움터로 거듭나도록 정책적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